Marry Christmas
Guardians of the Video game
2019.12.25
눈이 내렸다. 아주 펑펑 쏟아졌다. 패치는 오랜만에 그런 폭설을 보았다. 눈에 들어온 풍경이 전부 뿌옇고 흐렸다. 텔레비전 속 여자는 창밖과 똑같은 풍경을 화면에 띄우며 보도했다. 오늘은 최고 온도 영하 4도, 최저 영하 10도로 대단히 추운 날씨가 예상됩니다. 눈도 오전 내내 퍼부을 예정이니 우산도 잊지 마세요. 정갈한 음성을 들으며 패치는 이불 밖을 벗어났다. 목도 한 번 빙글 돌리고, 손목도 몇 번 매만지며 뚝뚝 소리를 내봤다. 그리고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여자가 활짝 웃었다. 패치는 서랍장 위의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벌써 뼈가 뻐근했다.
수호대 건물은 텅 비어있었다. 패치가 늘 출근 시간보다 20분에서 30분가량 일찍 출근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특히 더 일찍 도착했다. 성탄절이어서 출근 시간이 전원 앞당겨진 바람이었다. 패치는 입김을 뿜으며 사무실에 겉옷을 걸어두었다. 아무도 없는 건물은 쓸쓸하고 또 추웠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일 뿐이지 패치는 이곳이 무지막지하게 붐비고 더워질 것을 안다. 땀 냄새로 가득 차고 불쾌한 열기로 공간을 가득 메울 것이다. 오히려 이 한기가 더 산뜻한 것일지도 몰랐다. 미리 이 한기를 즐겨두어야 했다.
성탄절은 기적적인 명절이었다. 수많은 이벤트가 열렸고, 그 이벤트를 노리기 위해 온종일 휴일인 주인공님들이 끊임없이 접속해 1년 중 실적이 가장 잘 나오는 날이었다. 덕분에 성탄절에는 사원들이 지쳐 일을 못 해 서버를 터뜨리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재는 끊임 없이 날라야 했고 배우들은 옆 부서의 힐링 포션을 빌려 꿀꺽꿀꺽 마시며 일을 진행했다. 업무량이 3배에서 4배 가까이 상승하는 그날은 수호대의 피눈물로 빨간 날이 되었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였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 얼굴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힘내세요! 따위의 아침 인사를 건네며 느직느직 사원들은 게임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헝그리버드를 담당하는 사원들도 보이자 패치도 슬슬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올해 헝그리 버드 성탄절 이벤트는 코인 이벤트뿐만 아니라 전체 테마를 성탄절로 바꾸어야 했고, 또 새로운 한정 성탄절 스테이지도 열렸으며, 한정 성탄절 스킨도 출시될 예정이었다. 할 일도 참 많지. 패치는 주인공님들이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우선 새로운 스테이지를 준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새것인 만큼 불안정한데도 가장 많이 접속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스테이지는 눈밭에서 진행됐다. 좀 더 어려운 난이도로 나무들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고, 이따금 철근도 있었다. 패치는 크게 숨을 마셨다가 내쉬었다. 뿌연 입김이 흩어졌다. 대충 전날에 토대를 짓고 갔지만 그런데도 그 뼈대가 마냥 아찔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패치는 꾹 귀의 무전기를 눌렀다. 모바일 부서의 헝그리 버드 현장 담당 사원은 즉시 C 스테이지 작업을 실행하도록 하게. 패치 대리일세. 지직거리는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는 금방 끊겼다. 사원들은 아마 10분 뒤에 올 것이고, 나머지 사원들은 출근 후 10분 뒤에 더 내려올 것이다. 패치는 대충 시간을 계산하며 통나무를 집어 들었다. 그때 누가 덜컥 문을 열었다. 패치가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빨리 내려온 사원이 있다고?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사원이 아닌 치트였다. 치트는 방긋거리는 얼굴로 눈을 밟으며 패치에게 다가왔다. 외투도 벗어두지 않고 온 것을 보아하니 방금 출근한 듯싶었다. 패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5분가량이 남아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인원을 호출했군. 치트는 도착하자마자 패치 옆에 탁 붙더니 생글거렸다.
"아, 그래. 좋은 아침일세. 빨리 나 좀 도와주게나."
"아직 출근 시간도 안 됐는데 업무 시작입니까?"
"성탄절이잖나. 나 좀 도와주게."
"예예~ 알겠슴다. 와, 이렇게 찍소리 않고 바로 상사 말 들으며 업무 시작하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선배님은 비서 하나 참 잘 두신 거 알고 계십니까?"
치트는 툴툴대듯 말하고는 자기 목에 걸려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다시 접은 것을 정돈하고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패치의 목에 둘러주었다. 대충 둘러주는 게 아니라 패치 앞에 서서 치트는 풀리지 않게 꼼꼼히 목도리를 매줬다. 패치는 슬쩍 내려다보며 치트의 손이 생각보다 꽤 크고 하얗다고 생각했다. 다 매주고 나서 치트는 한 발자국 빠졌다. 검은색 체크무늬 목도리에서는 매캐한 향과 동시에 조금의 딸기향이 났다. 딱 치트스러운 향이었다. 머리를 살짝 비비니 어쩌면 치트의 향수 냄새도 나는 듯싶었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지. 안 그런가?"
삐쭉삐쭉한 이빨이 시원하게 웃었다. 치트는 그런 패치의 말에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패치는 치트가 매준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리며 현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터지는 그 순간, 건물 내부에 긴 알람 음이 울렸다. 삐이. 업무시간을 알리는 소리자 성탄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 순간 우르르 사원들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패치가 치트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수고 좀 해주게나."
"열심히 일하겠슴다~"
올해가 패치의 첫 성탄절은 아니었지만, 가장 힘든 성탄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겨우 찾아온 쉬는 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근 3개월 동안 가장 단비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고작 5분 남짓 되는 시간이지만 패치는 그것마저 충분했다. 물을 마시고, 가벼운 스트레칭 등을 하며 알뜰살뜰하게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옆의 치트도 그랬다. 치트는 효율적이게 사용하기보다는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물을 먹는 둥 지친 몸에 체력을 야금야금 불어넣었다. 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사원들은 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역을 뚫고 있었다.
"아이고, 1년에 한 번 있는 날이라 망정이지. 매일 이랬으면 전 수호대 관뒀습니다."
"자네도 참. 그래도 성탄절이 있는 날은 보너스가 두둑하지 않나."
"아, 맞슴다. 그게 있었네요."
시시콜콜한 잡담도 꽤 도움이 됐다. 치트가 히죽거리는 동안 패치는 다시 커다란 물통을 집고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얼리는 듯 싶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그런데 선배님은 이 귀중한 성탄절에 여기 갇혀 있는 거 싫지도 않으십니까?"
"나도 쉬고 싶은 마음은 있네만, 가장 바쁜 날인 걸 어떡하겠는가."
"아이참, 그래도 원래 이런 날은 연인이랑 데이트라도 하던가 해야죠~"
"애인이랑 놀 시간이 어딨나. 애초에 애인도 없고 말이야."
"선배님만 일하십니까?"
"자네는 애인 있나?"
치트가 볼멘소리를 냈다.
"없슴다."
"없으면서 뭐 그리 불만이 많은가."
"아, 아쉽잖습니까~ 그냥 확 선배님이랑 사귀어서 직장 데이트나 해버릴까요?"
"웃기는군. 나쁘지 않구만."
낄낄 패치가 웃었지만, 치트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패치는 치트가 굉장히 유흥적인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성탄절은 주인공님들한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대명절이었고 기념일이었다. 그러니 치트가 아쉬울 수밖에.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쉬는 시간 끝을 알리는 종소리는 마냥 야속하게 울렸다. 수호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전원 반사적으로 아픈 신음을 내며 겨우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치는 허리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번쩍 일어나고 나니 다시 한번 눈이 펑펑 내리는 스테이지가 패치를 부르고 있었다. 패치는 치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뒤, 재빨리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무수히 많았던 작업도 어느새 끝나고 사원들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패치도 마찬가지였다. 패치는 외투를 다시 입고 가방을 다시 멨다. 사실 패치의 목적지는 처음에는 집이 아니었다. 자신도 간만에 성탄절을 챙겨보고 싶었고 치트가 많이 아쉬워하는 것 같길래 치트와 함께 식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치트는 건물을 온통 뒤져도 보이지가 않았다. 목도리도 챙기지 않고 말이다.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목적지를 다시 집으로 돌리게 된 것이었다. 패치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자 눈은 그쳤지만, 아침보다 더 날 선 날씨가 패치를 반겼다. 패치는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새까만 밤이었으나 발걸음마다 주변의 전구들이 반짝반짝 또 알록달록하게 빛났다. 아, 예쁘다. 패치는 전구들을 구경하며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앞의 환하게 웃는 치트를 보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선배님!"
"자네, 퇴근한 줄 알았네만."
"직장 데이트라도 하러 왔죠~"
치트는 손에 든 케이크 박스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잇새로 허연 입김이 뿜어졌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치트가 이 근처에 있을 것도 예상치 못했고, 케이크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치트가 케이크를 넘겨주자 패치는 위의 구멍으로 내부를 보았다. 성탄절 테마로 잔뜩 꾸며놓은 케이크였다. 눈사람이 돋보이는 생크림 케이크. 패치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케이크였다. 허, 또 어떻게 알고. 패치는 짤막하게 웃음을 뱉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치트를 올려보았다. 치트는 손을 뻗어 패치의 흐트러진 목도리를 다듬어줬다.
"저보다 선배님이 더 잘 어울리네요, 질투남다."
"아, 맞다. 자네에게 돌려줘야지."
"됐습니다~ 집에 가서 돌려주십쇼."
"자네 집 말인가?"
"그럼 케이크를 어디서 먹습니까? 빨리 오십쇼."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치트가 패치의 팔짱을 꼈다. 평소에는 징그럽다며 팔을 뺐을 테지만, 오늘은 그다지 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 치트. 자신의 후배이자 오랜 파트너. 패치는 이런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몇이나 될까 생각했다. 자신을 잘 따르는 동시에 잘 챙기는 사람. 별다른 보상이나 악의 없이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사람. 모두에게 서글거리고 일도 잘하는 맑은 사람. 패치는 치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미소에서는 순박함이 말투에서는 달콤함이 느껴지는 치트는 놀라우리만치 완벽한 사람이었다. 패치는 치트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치트가 살짝 놀라며 내려다보자 패치가 웃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치트는 그 말에 한참 대답이 없었다. 잠깐 어깨를 움찔거리기도 하고 손끝을 불안하게 매만져도 보다가 결국 도달한 것은 미소였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다. 늘 똑같이 능글거림이 살짝 묻어나는, 광대를 한껏 올린 이를 드러내는 웃음. 그러나 눈에 담긴 빛은 약간 달랐다. 저 빛을 어디서 봤더라. 자신이 업무를 마치고 나서 봤던 것 같았다. 약간 좀 저릿한 느낌이 들게 하는 그 빛은 사람을 미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치트 뒤에 무수히 많은 적색과 녹색의 향연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도록 화려했고, 오늘은 성탄절이었으니까. 즐거운 캐럴이 흐르고 영하의 날씨에도 따뜻한 날이었다. 그리고 패치 옆에는 자신을 위해 늘 애써준 치트가 옆에서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일세, 치트."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대리님!"